주체사상에 대하여

(4) 다시 돌아보는 주체사상  

세계로김 2018. 10. 13. 12:51

요즘 황장엽씨를 암살하러 온 간첩 두명이 잡힌 것을 계기로, 황씨가 김정일을 두고 “그놈, 그녀석”이라고 막말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의 최고수뇌에 대해 이렇게 말했으니 지난시기 주체사상을 함께 만들었던 동지들이 불구대천의 ‘원쑤’가 돼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황장엽을 인터넷 포털의 검색칸에 넣어봤다. 그가 남한에 와서 주체사상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주체사상이 골격을 잡아가던 60년대에 김일성대학 총장을 역임했던 사람이다. 주체사상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심한 말은 아니다. 도서관에서 그의 책 한권을 찾아봤다. 2001년 발행된 “인간중심철학의 몇가지문제”라는 책인데 두 번째 장에 “인간중심사상의 철학적 기초”가 눈에 띈다. 이중에 한 문단을 뽑아봤다. 

  

“지난 시기의 사람들은 주관(정신)과 객관(물질)을 대립시켜놓고 객관이 주관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주관이 아니라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과 사회적 힘을 다같이 가지고 있는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주체와 물질적 힘만 가지고 있는 덜 발전된 존재인 객관을 대립시켜놓고 객관에 대한 주체의 자주성을 주장하는 것이다.”--51쪽 

 

오랜만에 이런 구절을 대하니 20여년동안 잊고 지냈던 주체사상의 핵심이 추억처럼 되살아온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는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을 부정하고 ‘극복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누구나 무지하게 어려운 이론일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같다. 그러나 길고 복잡하게 말할 재주도 능력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가 될까.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정신보다 물질이 세계의 본질이라고 보았으며 정신도 물질의 진화된 한 형태라고 했다. 물질중심주의는 과학적 합리주의의 뿌리가 됐다. 이에 비해 주체사상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물질이 아닌 정신의 우위를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정반대이다. 인간은 정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존재라고 했다. 나는 처음 이런 말을 접하고 그 내용이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상식적인 말이 그처럼 대단한, 무서운 철학의 근간이라니? 

  

그렇다면 주체사상이 우리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파의 철학을 부정한 좌파의 철학을 다시 한번 부정하면서 제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원위치로 돌아왔는지 살펴보자. 주체사상은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등 세가지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서 주체사상을 가장 독창적으로 만든 요소가 바로 의식성이다. 의식성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쓸데없이 난해해진다. 얼마든지 쉽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자기결단이 스스로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는 동력이라는 것인데 이에 상응하는 우리 말이 있다. “하면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남북이 모두 같은 신화를 갖고 있다. 그래서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례를 들어보자. 김일성은 60년대초 뜨락또르(트랙터) 시범운전 자리에 참석했다. 처음으로 국산 제품을 만들어 김일성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자리였다. 그런데 기계의 결함 때문에 앞으로 가지 못하고 뒷걸음쳤다. 당의 일꾼들이 혼비백산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뒤로 간다는 것은 앞으로도 갈수 있다는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없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남한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지난 80년대 현대건설의 서해안 간척지 공사의 경우를 보자. 당시 양쪽에서 둑을 만들어 중간에 이르렀는데 조류가 워낙 세서 트럭으로 무거운 돌들을 퍼부어도 흘려나가버렸다. 최대의 난공사였다. 이때 정주영이 아이디어를 냈다. 거대한 폐유조선을 가져다가 물막이하고 공사를 완성했다. “하면 된다”는 신화의 결정판이다. “하면 된다”는 한국경제 발전의 동력으로 외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외국인들에겐 Icandoism으로 불린다. 잘 생각해 보라. 김일성의 뜨락또르나 정주영의 폐유조선이나 서로 통하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북한 주체사상의 핵심인 의식성이나 남한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철학인 "하면된다"는 사실상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한다면 주체사상을 좀 안다고 말할 수 있고 별거 아니라고 말할수도 있을 것같다. 이런 대단치 않은 것이 섣불리 접근만해도 경을 쳤던 주체사상의 핵심이라니... 황장엽은 위의 책에서 “인간중심철학은 위대한 변혁의 시대에 주인공으로 태어난 세대들에게 운명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이 시대의 남한 젊은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철학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가 남한에 와서 주체사상을 부정하기는커녕 더 발전시킬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런 배경때문일 것이다.  

 

그가 위의 책에서 밝혔듯이 68년 마르크스의 계급론 유물론에 회의를 느끼고 인간중심주의로 돌아온 이래 그의 사상은 인본주의과 접하게 됐다. 인간의 본성에 입각한 철학은 어느 것이든지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두가지가 대립될 때 주체사상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80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체사상의 의식성을 두고 우경화됐다고 비판했다. 정통 사회주의자들은 현실과 과학을 중시하므로 될 일은 되고 안될 일은 안된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주체사상은 안되는 일도 되게 하자고 한다. 그래서 억지를 쓰는 것같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남한 자본주의의 동력과 다를게 없다.

 

북한의 주체사상과 남한의 하면된다라는 이데올로기가 흡사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를 통해 또한가지 확인할수 있는 것은 유심론을 비판하면 유물론이 되듯이 유물론을 비판하면 다시 유심론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마르크스의 유물론을 비판하면서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유심론적이다. 무언가 새로운 제3의 것이 아닐까 했는데 본원적인 차원에서는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볼수 있다. 

 

그렇다면 주체사상이 남한의 철학과 다름이 없는데 왜 그처럼 엄격하게 접근불가 딱지를 붙여놓았던 것일까. 남북대립 국면에서는 대립의 내용은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적국이 주장하는 것은 그 내용과 상관없이 반대해야 했다. 연방제도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연방제는 힘이 강한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북이 남에 비해 체제가 우월하다고 여겼던 시기인 60년대 70년대에 연방제 통일을 했다가는 남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 체제 대결에서 남이 숭리한 지금 연방제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될까. 남한의 문물이 북한주민에게 제한없이 쏟아지면 그체제는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연방제는 북의 것이므로 남한의 보수는 지금도 반대한다. 맹목적인 극우의 논리라고 할수 있고 달리 보면 일종의 프레임전쟁이다. 

 

다시 마르크스주의와 김일성주의로 돌아오자. 근본적인 세계관이 다르니 80년대에 양쪽은 사사건건 첨예하게 부딪혔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 이성적 냉철한 판단을 보다더 중시해서 그쪽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중에 훗날 사법시험 합격자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반해 김일성주의에 지나치게 경도된 사람들은 종교의 신앙과 흡사해서 맹목적인 경향을 나타냈다. 불굴의 투지로 미제의 각을 뜨자, 이런 섬뜩한 구호가 나타난 배경도 주체사상의 이런 신앙과 같은 속성이 배경이 된 것이라고 본다.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카스트로에 대한 호의에 비하면 김일성에 대한 평가는 인색한데 이런 특성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양쪽의 대립은 각각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본질로 보면서 더욱 치열해졌다. 실제로 내가 겪은 일을 하나 소개한다. 89년 봄 소위 공안정국시기에 서울구치소 8동하 사동에는 네명의 양심수들이 있었다. 이들도 역시 두 패로 나뉘어 대립했다. 어느날 모포를 널고 들어오다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의 토론장면이 그림처럼 내 머리에 각인돼 있다. 노동운동을 하다 들어온 30대 선배와 화염병처벌법으로 들어온 대학생사이에 격론이 붙었다. 선배가 먼저 도발했다. “지금 해방이후 처음으로 철도노동자가 전국적인 파업을 벌이고 있는데 대학생놈들은 길바닥에 누워서 그게 뭐냐?” 당시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전대협의 시위대가 남북협상을 위해 판문점으로 가자면서 나섰는데, 무악재 고개 너머서 길이 막히자 아스팔트 바닥에 드러누었다. 소위 연와투쟁인데 이것을 비꼰 말이었다. 이에 대해 대학생도 흥분하며 “학생은 노동자가 아니잖아요?”라고 맞받았다. 

 

주체사상과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각각 NL(민족해방파)과 PD(민중민주파)의 뿌리이며 이들은 지금도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원류를 이루고 있다. 과거의 흘러간 낡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있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