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모르는 여자 안철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의 가장 큰 약점은 국민 애송시가 적다는 점이다. 김소월의 시가 쉽고 편하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오는 것과 비교된다. 고은의 초기 시는 특히 관념적 사변적이어서 읽기 어렵다. 그의 시중에서 국민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시귀를 꼽는다면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이다.

 

아름다운 첫사랑 그러나 대부분 깨지고 마는 가슴아픈 사랑의 과정이 이 한마디에 담겨있다. 그 핵심은 미지의 상대에 대한 환상이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열망과 희망을 일방적으로 투사해서 실물대 이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좋아하는... 그러다가 실체를 접하고 나서 그런 사람인줄 몰랐다고 실망한다. 누구나 젊은 시절 이런 슬프고 서투른 사랑 한번 해보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전국민적으로 이런 연애를 하고 있다. 그 상대는 안철수교수이다. 그가 국가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국가적 의제에 대한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지 검증이 되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인물이라는 참신성이 기대감을 잔뜩 높여주고 있다. 우리사회의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는 관념적 이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모두 집적해서 안철수에게 투사하고 있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더니 그가 오랜 동안의 구애를 받아들여서 마침내 만남을 허락할 것같다. 어제 기사를 보면 안교수가 6월경이면 등판할 것이라고 한다. 그가 대선에 나선다면 검증과정에서 환상의 베일이 무참히 벗겨질 것이다. 그리고 사회과학적인 지식도 이해도 경험도 없는 그리고 관념적이며 무능한 그의 본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안교수의 최근 발언이 이런 짐작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진보 보수 이념이 아니라 상식 비상식이 중요하다. 진영논리에 기대지 않겠다. 정당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찍으라. 그의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이 그에 열광하고 지지하는지 짐작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정치하는 사람들 왜 그렇게 싸우냐 좀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달라. 정치인들이 싸우는 걸 보면 애들 보기 창피하다. 젊잖은 사람도 국회에만 들어가면 왜 사람이 망가지나. 이건 정말이지 정치가 무언지 모르는 말씀이다. 

 

정치가 사회갈등을 수렴해서 대신 싸워주지 않으면 이해당사자들이 시민들이 직접 거리로 나서야 한다. 사회비용이 훨신 비싸게 먹힌다. 사회갈등은 어느 사회에서나 불가피하다. 그리고 아무리 다양한 갈등이라도 그 내용을 분류해보면 대부분 진보 보수로 나눠진다. 그래서 문명국의 정치는 예외없이 좌우로 나뉘어 대립한다. 아랍국가들에 둘러싸여서 반세기이상 싸우는 이스라엘같이 특수한 조건에 있는 나라도 마찬가지다. 내부에는 시오니즘정당과 사회주의정당으로 좌우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지 않은가. 

 

안교수는 늘 새로운 것을 탐식하는 대중들의 허위의식에 영합해서 나타났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것은 늘 서투른 것으로 결과되기 마련이다. 백마타고 멋지게 나타나는 왕자님은 결혼앞둔 처녀에게 뿐 아니라 정치판에서도 찾기 어렵다. 김병준교수는 메시아는 없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안철수현상은 비극으로 끝날 것같다. 국민들도 허탈해지고 안철수 자신도 망가질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데자뷰가 있지 않았나. 기업경영 잘 하던 유한킴벌리 문국현사장을 끌어내어서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양 포장했지만 결과는 꽝이었다. 이번에는 안철수인가. 선거때마다 이런 인물들을 필요로 하는 한국정치가 문제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3895394

(3) 안철수, '벌레'들과도 소통하라

[김제완의 '좌우간에']<17> 상식으로 우리사회 문제를 해결할 있을까


지난달 추석을 앞두고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재래시장을 방문했다. 문재인은 서울 망원시장의 상인들을 만나 대형마트 입점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꿔 재래시장을 보호하겠다고 말했다. 안철수는 수원 못골시장을 방문해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먼저 상인들이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명지대 신율교수는 두후보의 발언을 비교하며 안철수의 말에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없다고 지적했다.

박근혜후보까지 포함해 세 후보 모두 일자리 만들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방법은 잡 셰어링(일자리 나누기)과 성장을 통한 일자리 늘리기가 있다. 진보와 보수의 방법론이다. 정치인들은 두 패로 나뉘어 제각기 자신의 방법이 옳다며 다툰다. 선진국 정치도 다름이 없다. 그런데 안철수는 진보 보수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다툼도 보기 싫다며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안철수의 생각이 궁금해져서 그의 저서인 "안철수의 생각"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 책의 대부분의 지면에 우리 사회의 현안문제들에 대한 그의 진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그런데 진보 보수 이념등의 용어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념에 대한 언급은 한번 나온다. 그의 뿌리깊은 편견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중에는 이념으로 편을 나눠서 자기와 반대쪽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실 확인도 해보지 않고 무조건 공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51쪽)

이 책에 언급된 우리사회의 주요 과제들 몇가지를 뽑아봤다.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 민주화 산업화, 공정한 시장경제 경제적 불공정, 의료의 공공성 의료의 민영화 등이다. 아무리 복잡해 보이는 사안일지라도 늘 대립되는 두가지의 입장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모든 문제가 진보 보수라는 패러다임 안에 놓여있지만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을 다시 되새겨보자. 

가족문제는 보수 교육문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이면 진보, 보수이면 보수여야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 진보 보수 구분은 효력을 잃었다. 진보 보수를 굳이 나누려는 사람은 그 구분으로 어떤 이득을 보려는 벌레같은 사람이다. 진보 보수가 아니라 상식 비상식이 중요하다. 이런 요지의 말을 반복했던 안철수가 저서에는 이 주장을 게재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의 비판을 듣고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건 아닌 것같다. 여러 말로 논란을 일으킬 필요없다, 직접 보여주면 된다 이런 타산인 것같다. 그는 실제로 이 책에서 진보 보수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사회 문제를 설명한다. 진보 보수 용어조차 찾기 어렵다. 이 책을 통독한 끝에 아래 구절을 가까스로 발견했다. 이것도 소통을 말하다가 사례로 든 것이다. 

"사실 보수, 진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저는 이 두 진영이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라는 것은 그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세력이고, 진보는 새롭게 도전하고 발전하게 만드는 세력이죠. 양쪽이 소통하고 타협해야 한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도전과 발전의 기회도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90-91쪽) 

진보 보수 자체를 부정했던 때와 비교하면 진전된 변화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같지 않다. 이어지는 글에서 여전히 상식과 비상식을 우선시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상식과 비상식의 대립이 보수와 진보의 건전한 협력을 막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누가 봐도 절실한 복지확충, 경제 민주화같은 과제에 대해서도 '좌파'의 딱지를 붙이며 색깔 공세를 펴는 비상식적 세력이 건전한 보수와 진보의 소통을 방해하거든요. 이제는 우리가 상식을 회복하고 합리적인 소통과 합의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1쪽)

비상식적 세력이 진보 보수 간의 소통을 방해한다고 했는데 이 세력의 정체가 무엇일까. 복지확충과 경제민주화를 반대해온 사람들이 틀림없다. 그들은 보수파이다. 그중에서도 색깔공세를 가했다면 강경보수 극우파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극단세력이 건전한 진보 보수의 소통을 방해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좌우의 연장선에 있는 극좌 극우를 이용해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좌우 구분을 기피하는 그는 비상식적 세력이라는 애매한 용어를 사용한다.

상식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교양있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덕목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이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볼 때 사안의 핵심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까. 이런 점이 염려가 된다. 상식은 그를 엉뚱한 길로 이끌 수 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대형마트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먼저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다니. 그가 돌아간 뒤에 상인들의 입에서 어떤 말들이 나왔을까 궁금해진다.

앞에서 그가 제기한 과제들로 다시 돌아가 보자. 보편적 복지 선별적 복지, 민주화 산업화, 공정한 시장경제 경제적 불공정, 의료의 공공성 의료의 민영화 등의 이항적인 문제에서 어느 것이 상식인가. 여러 계층의 이해관계가 개입돼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는 문제들을 상식이라는 잣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박동천 교수가 며칠전 프레시안에 올린 글에서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다.

기업의 경우에는 자신의 "상식"과 다른 상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회사에서 쫓아내거나 거래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반면에 한 나라의 제도와 정책을 관리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나와는 다른 "상식"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상식"만이 유일한 상식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안철수는 당선되더라도 대통령으로서는 실패할 것이 뻔하다. (박동천, "안철수, 이런 식이면 새 시대 꿈 접어라") 

박동천은 이어서 "자기가 뜻하는 '상식'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상식이 있다는 사실을 지각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상식에도 이런 상식과 저런 상식이 있다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자본가의 상식과 노동자의 상식이 있다. 일하지 않은 사람은 먹지 말라며 무노동 무임금을 주장하는 것은 자본가의 상식이다. 자동차 공장에서 왼쪽 바퀴를 조립하는 정규직과 오른쪽 바퀴를 조립하는 비정규직의 임금이 두배나 차이가 난다. 이런 불합리를 철폐하자는 주장은 노동자의 상식이다. 상식으로는 이런 문제들의 진실을 분별할 수가 없다. 

ⓒ뉴시스


상식의 관점에서 사회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대학생들의 멘토로서 강연할 때는 통용될 수 있겠지만 정치지도자의 철학이 되기에는 너무나 불충분하다. 그의 인식적 한계는 앞으로 여기저기서 드러나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안철수는 지난 7일 "문제가 아니라 답을 주는 정치"등 정책비전 일곱가지를 발표했다. '안철수의 생각'을 발전시킨 정책이다. 그는 이날 발표의 미흡함을 인식한듯 "이번 선거의 과정에서 거창한 약속을 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신 정치의 과정을 공유하겠다. 솔직히 말씀드리고 국민 여러분의 이해를 구하겠다"며 '진심의 정치'를 강조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특히 정치의 세계는 더 그렇다. 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발전한다. 정치개혁이란 한 사회가 오른쪽으로 편향됐을 때 왼쪽으로 이끌어내고, 왼쪽으로 기울어졌을 때 오른쪽으로 이끄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좌우를 통해 정치개혁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지금 우리사회의 개혁은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이런 틀에서 벗어난 그 무슨 "거창한 약속"같은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었다. 

안철수가 상식을 고집하는 것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우리사회의 탓이 크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좌우를 충분히 이해하고 상식을 말해야 한다. 그가 내세우는 소통은 방법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가 진심으로 소통을 지향한다면 상식 비상식만으로 우리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진보 보수로 세상을 보는 "벌레"들과도 소통하라.  

(2) 안철수에겐 '유언비어 유포' 보이겠지만

[김제완의 '좌우간에']<9> "왼손 오른손 쓰는 좌우 이념은 영원해"



흔히 TV에서 즉석 여론조사를 할 때 사용하는 방법인데, 만약 명동거리에 나가서 행인들을 대상으로 이런 조사를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길가에 좌판을 만들어서 두 개의 질문을 담은 판을 세워 놓는다. 하나는 "이념이 살아야 정치가 산다." 다른 하나는 "사회갈등은 불가피하다 해도 이념갈등만은 안 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준비된 손톱 크기만한 둥근 스티커를 붙이라고 해보자. 어떤 결과가 얻어질까?

이념갈등만은 안 된다는 대답이 1대9 정도의 비율로 더 많이 나올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두 그룹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다. 다수파는 그동안 이념을 말하는 사람들을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암적인 존재로 취급해왔다. 지긋지긋하고 골치아픈데다 사람들의 사이를 벌려놓는 것이 이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념을 말하는 사람들은 빨갱이 취급을 당해왔다. 그런데 그 사람들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 지난 7월말에 출간됐다.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 이진우의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가 그 책이다. "대한민국 정치이념 지형도"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이 책을 열면 "이념이 살아야 정치가 부활한다"는 여는 글로 시작해서 기세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정치적 이념은 우리를 바람직한 미래사회로 안내하는 이정표입니다." (11쪽) "이념 없이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눈먼 장님이 길을 안내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에"(12쪽) "우리가 정치적 판단의 척도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고민한다면, 우리는 좌우의 구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좌우는 정치적 지각과 판단의 좌표이기 때문입니다."(13쪽) 

이데올로기의 나무는 언제나 푸르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이념을 중시하는 것일까. 이 책의 앞부분은 여기에 논점이 맞춰져 있다. 이미 1960년에 다니엘 벨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나왔으며 90년대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이 출간됐다. 이 두 권 모두 미국인에 의해 쓰여졌으며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는 선언이 담겨있다. 

저자는 미국학자들의 주장을 유럽학자의 말을 빌어 반론을 펼친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이렇게 말했다. "이념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 과거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또는 새롭다고 주장되는 다른 이데올로기로 대체되고 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의 나무는 언제나 푸르다. 게다가 이데올로기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만큼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는 것도 거듭 증명돼 왔다."(36쪽) 

이념의 시대의 종언은 사실은 좌파의 시대가 지나고 우파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점을 간파한 보비오는 이념의 종언이 또하나의 이념이라고 지적했다.

저자는 "정치적 이념의 좌우구별은 우리가 왼손과 오른손을 함께 사용하는 인류로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위대한 이원론"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좌우이념에 대한 이처럼 명료하고 탁월한 비유를 일찍이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이념을 증오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이념이 인간 존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왼손 오른손이라는 인간의 생래적 조건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면 좌우이념의 생명력이 그처럼 강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면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에 이른다. 그것은 물질이 본질이냐 정신이 본질이냐는 물음이다. 좌우이념은 18세기에 탄생했지만 그 시원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물론과 유심론이 아닌가. 인류 문명의 출발점부터 좌우이념이 같이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좌우이념의 기능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에 관한 좌우의 경쟁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해 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의 생산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좌파와 우파의 이념대결과 이념 경쟁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시대에는 이념에 대한 수많은 오해가 난무한다. 저자도 그중에 하나인 안철수의 발언에 주목했다. 

ⓒ연합


"정치적 이념은 정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인가? 안철수는 이런 멋진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외국서 보수 진보 논의는 20년 전에 이미 끝났다.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만 있을 뿐이다.'"(30쪽)

안철수의 말이 맞다면 이진우의 논리가 무력화되어서 그는 비상식적인 발언 또는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이런 멋진 말"이라니... 이념적 구분에 대한 우리사회의 반감이 얼마나 큰지, 이에 대한 인식이 절실하지 못한 것 아닐까. 그러나 이념 구분에 대한 경시가 2차적 혼란을 낳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베이비붐 세대를 기다리는 것은 성장의 열매가 아니라 노후의 가난입니다. (...) 우리의 삶과 현실에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52쪽) 

저자는 정치를 멋있게 하려는 사람들은 좌파와 우파의 구별조차 진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념갈등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정치적 이념조차 폐기해버린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왜 그런 것일까. 좌우는 새로운 참신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늘 단조롭다. 지루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곧 싫증을 낸다. 위에서 언급한 베이비붐 세대의 어려움의 해법을 말할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전문가들은 대안을 말하면서 기존의 진보가 문제가 있다면서 새로운 진보, 진보의 재구성, 진보 이후 등의 현란한 담론을 제시한다. 여기에 가까이 가보면 아주 복잡한 언어체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좌우이념은 누구나 알 수 있게 분명히 말해준다. 베이비붐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곧 복지이며 그것은 좌파의 가치라고. 

극좌 극우에서 좌파적 우파 우파적 좌파로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좌우이념 구분의 효용과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지만 이 책의 최종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본격 주제를 말하기 위한 전제이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좌우의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따로 노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좌우와 중간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통찰을 보여준다. 

"중도가 위험하고 어려운 까닭은 중도가 좌우의 양극단에 둘러싸여 있을뿐만 아니라 좌우의 지속적 대결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좌우가 있어야 중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중간은 끊임없이 좌우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사실 좌우 없는 중간이란 있을 수도 없지만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41쪽) 

중도를 말하기 위해서 좌우를 먼저 언급한 이유가 이해된다. 좌우가 있어야 중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진전된 논리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좌파이지만 우파의 문제의식을 인정하는 '우파적 좌파'와 우파이지만 좌파의 대안을 포용하는 '좌파적 우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나는 좌파야' 혹은 '나는 우파야'라고 분명히 밝히면서도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건강한 '정치적 중도문화'를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희망과 바람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16쪽) 

그의 메시지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우리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극좌 극우의 대립구도에서 중도좌 중도우가 맞서는 구도로 가야한다. 어찌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 메시지를 입증하고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정치철학적 사유활동을 계속한다. 

그 성과로 우리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가 "중도를 위한 싸움"이라는 인식에 이른다. 양극단에서 가운데로 조금씩 나오는 행보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중도에 서야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되고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메시지이며 극단적 이념갈등의 해법이다.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는 책 제목도 이것을 가리킨다. 

정치의 목표는 중도를 위한 싸움인가 

여기서 논쟁적인 지점이 발견된다. 저자 논리의 보완 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해보겠다. 극좌 극우를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면 그 이념 지지자들은 무언가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들인가. 극단파들이 힘이 세서 우리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들 존재 자체가 극복대상인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합당한 만큼의 몫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강준만 교수가 언젠가 안티조선운동의 핵심은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극단과 중간의 문제를 우리 현실 속의 사례로 설명해보자.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권위적이며 비민주주의적인 행태를 보인다고 해서 그들을 멸종 대상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그런 입장은 반공주의와 다르지 않다. 극좌파가 그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들은 본래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극좌파라고 하지 않고 진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긴 언어의 착시효과가 지금의 혼란을 만들어낸 것 아닐까. 그렇게 보면 지금의 떠들썩한 통합진보당 사태는 헛소동에 불과하다. 

우리사회에는 소수 극좌의 반대쪽에 비대한 규모의 극우파가 있다. 이들도 역시 민주주의 원칙을 잘 따르지 않는다. 너무 큰 극우는 줄이고 너무 작은 극좌는 키워서 가장 교과서적인 모델 만들기를 최종적인 목표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중도를 위한 싸움"은 그 도정에 이르기 위한 한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과서적인 모델의 실례는 서구나라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 정치의 경우 이념 스펙트럼 상 극좌 중도좌 중도우 극우 등 네가지의 포스트가 설정돼 있다.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으며 서로 정권을 주고받는다. 극좌와 극우는 보완적인 역할에 머문다. 그러면서도 네 개의 포스트마다 하나씩의 정당과 신문이 서있어 이념 단위의 공동체가 만들어져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우리사회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볼모잡혀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극좌와 극우인가 하는 점이다. 여당과 야당은 전통적으로 극우와 중도우가 맞서는 구도였으며 좌파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의석을 얻은 것은 지난 17대국회가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격렬한 사회갈등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아니라 미국식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이었다. 그래서 이념의 차이로 인한 갈등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태도가 본질적인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저자가 말하는 중도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사회에서 적지 않은 논의가 이뤄져왔다. 김진석 교수는 "우충좌돌" 중도론을 설파해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백낙청 교수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내놓았다. 한국일보 이종재 전 편집국장은 몇 해 전 중도를 표방하는 편집방침을 내세운 바가 있었다. 그들의 중도와 이진우 교수의 "건강한 정치적 중도문화"는 어떻게 같고 무엇이 다른가. 여기에 대해서는 별도로 따져 볼 기회가 있기를 기대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변적인 이론만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 이 책은 7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여기서는 첫 번째 장 "중간에 서야 좌우가 보인다"에 서술된 논리를 살펴봤다. 이 책의 본문은 "중도를 위한 싸움"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여섯 개의 생생한 현장은 다음과 같다. 제목만 붙이는 사정을 이해바란다. ▲자유인가, 평등인가? ▲성장인가, 분배인가 ▲'규모'의 경제인가, '균형'의 경제인가? ▲'자율적 복지' 인가, '보편적 복지'인가? ▲'중앙 집중'인가, '균형 발전' 인가? ▲통일, '민족 공동체'인가, '자유민주 체제'인가? 

끝으로 이 책을 펴낸 관계자들께 한마디 붙인다. 지금 진보 보수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구분으로 충분하다는 안철수 교수의 발언이 우리사회에서 지배적 담론으로 서있다. 안철수는 세상을 진보와 보수로 보는 것은 "머리 나쁜 사람들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벌레"라는 비하적인 표현도 사용했다. 그런 마당에 좌우 구분의 유효함을 주장하는 이 책의 출간은 안철수에 대한 도전이고 도발이다. 그럼에도 시대의 흐름에 압도되어서 미미한 소리를 내고 잦아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이 책의 메시지가 우리사회에서 의미있는 목소리로 전달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출판사는 토론회나 북콘서트 같은 이벤트를 만들고 이진우 교수가 직접 대중을 만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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