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도의 적들

 

중도는 그 존재가 늘 불안하고 위태롭다. 분명하게 자기논리를 세워서 강조하기도 어렵고 좌파와 우파에 비해서 열성적인 지지자의 숫자도 적다. 필자는 중도의 존립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무엇인가 찾아보고 그것들을 "중도의 적들"이라 표현했다.  

 

3-1. 중도의 적들 1 : 중도는 왜 인기가 없나

 

중도는 왜 인기가 없는 것일까. 전명혜선생님이 올린 글중에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정부의 제3의길에 대한 소감은 중도에 대한 체험글이라 할 수 있다. 블레어의 좌우를 넘나드는 태도에 혐오감을 느낀 것같다. 이와 꼭 같지는 않지만 블레어 정권시기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교훈을 얻을수 있다.

 

98년부터 5년동안 시라크 대통령과 함께 동거정부를 이끌었던 프랑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조스펭은 블레어보다는 더 왼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총리재직기간 경제가 좋았고 실업율이 처음으로 한자리로 내려갔다. 그는 이때 좌파이면서 우파적인 정책을 사용했는데 그 결과는 씻을수 없는 치욕으로 돌아왔다. 프랑스 유권자들은 5년을 평가하는 2002년 대선에서 우파 시라크후보에 이어 극우파 후보를 2위 자리에 오르게 함으로서 사회당 조스펭에게 결선투표 탈락이라는 수모를 안겼다. 진정성을 강조하여 국회연설에서도 직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 등 여러모로 노무현과 닮았던 조스펭, 그는 다음날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 역시 비운의 정치인이라 해야 할른지...

 

시대의 흐름상 우파가 필요할 때 좌파가 집권하면 이같은 불상사가 생긴다. 좌파정권이 우파정책을 씀으로서 지지자들에게 배신감을 주었고 우파의 표를 가져오지도 못했다. 블레어 조스펭 노무현 모두 비슷한 위상에 서서 유사한 경험을 한 정치인들이 아닐까. 

 

우리는 과거 80년대에 ‘오소독스(정통)’라는 말의 권위를 경험했다. 토론중에 정통적이냐 아니냐를 따졌다. 물론 좌파정통을 말한다. 한 발이라도 더 왼쪽에 충실한 정파가 승리하곤 했다. 그 당시 권력이 극우였으므로 이같은 입장의 우세는 현실적 근거가 있었다. 왼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가는 것이 사회를 그만큼 더 균형으로 이끄는 것이며 선이고 정의였다. 

 

그런데 이같이 올곧은 그리고 선명한 태도와 입장이 옳다는 경험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그뒤에도 변함없이 선명한 지사적인 태도를 더 품격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쪽과 저쪽 예를 들어 좌우를 넘나드는 타협적이고 중도적인 태도는 수준이 낮은 것으로 보는 습성이 생긴 것같다. 

 

그 원인은 권력과의 관계로만 볼수 없는 윤리적인 어떤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같다. 개인의 이익을 향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늘 이익을 찾아 변신하는 기회주의적인 처신이 횡행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인 것같다. 

 

그러나 지난 20여년 민주화의 발전에 걸맞게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 개인적인 소회이지만 이제는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을 선택하지 않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편벽함이 불편할 때가 있다. 

 

이글의 뒤편에서 송호근의 ‘중심의 이동’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권력이 어느쪽에 있는가에 따라서 사회운동이나 지식인의 위상이 영향을 받는다. 80년대같은 극우정권에서는 극좌로 나가는 것이 옳았다면 정권이 중도우로 이전했을 때는 중도좌에 놓여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본다.  


3-2. 중도의 적들 2 : 단봉낙타와 쌍봉낙타

 

“각종 설문조사에서 우리국민은 30%를 보수, 40%는 중도, 30%는 진보라고 답한다. 하지만 성장과 복지등 경제사회 정책과 북한문제같은 외교안보 정책에 대해서는 보수 대 중도 대 진보의 견해가 각각 40%, 20%, 40%로 나타난다. 전체 성향은 ‘단봉낙타형’ 그래프를 그리는데, 개별사안에선 ‘쌍봉낙타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 합의가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통합이 쉽지 않은 이유다.” (김호기 주간동아 2009년 7월 14일자 34쪽) 

 

현재 이념의 양극화와 이념대립의 격화가 운위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이 40%라니, 국민 절반 가까이가 중도라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여론조사에서도 이같은 사실은 확인할수 있다.  

 

한국일보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 지난 6월 7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이념성향을 '중도'로 규정한 응답자는 38.9%에 이르렀다. '진보'와 '보수'라는 대답은 각각 28.0%, 27.2%였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8월5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본인의 주관적 이념성향'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들은 "중도> 진보> 보수"순으로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의 이념성향을 ‘중도’라고 대답한 사람은 43.4%, '보수'라고 답한 사람은 24.9%였고, '진보'라고 말한 사람은 31.7%였다.**1

 

진보 보수가 한국사회의 특산품이듯이 국민 열명중 네명이 중도를 선호한다는 사실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같이 높은 중도선호현상은 비정상적인 심리의 반영일 가능성이 높다. 

 

김호기의 지적처럼 단봉낙타는 늘 중심에 서려는 사람의 심리와 관련해서 나타난 것같다. 중심에 서있는 것이 옳고 어느쪽으로든 치우친 것은 그르다는 심리이다. 

 

연세대 명예교수 송복은 “모든 사람은 자기를 중간에 배정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당신은 진보파요 보수파요' 혹은 '당신은 좌파요 우파요'하고 물으면 으례 진보도 보수도 아니고,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파가 제일 많이 나온다. 이것은 최근 우리 사회의 조사에서도 늘상 보는 것이고, 말할 것도 없이 다른 나라도 그러하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극極에 이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인가, 혹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인가. 선천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말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사회적으로' 그러한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논단 2005년4월호 <보수와 진보가 있을뿐 중도는 없다>중에서)  

 

김호기의 지적처럼 전체사안에 대해서는 단봉낙타형 그래프가 그려지는데 반해 개별사안에는 쌍봉낙타형이다. 토론을 할 때나 어떤 특별한 사회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정한 조건에 이르면 중도좌도 중도우도 극좌나 극우에 자리를 내준다. 평소에 머뭇거리며 이쪽저쪽을 보아왔던 중도좌 중도우는 좌와 우로 빨려들어간다. 앞서말한 원심력효과이다.

 

극좌 극우의 자리에 서서 보면 불분명했던 논점이 명료해진다. 그래서 이쪽 진영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늘 입장이 분명하다. 진중권이나 조갑제와 같이... 

 

이글을 쓰는중에도 중도에 대한 생생한 자료는 계속 생산되고 있다. “중도 의견 사라지는 댓글 문화”라는 동아일보 8월16일자 기사도 흥미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재산 기부'라는 기사에 딸린 댓글을 분석했는데 '중도가 사라지는' 인터넷 토론의 특징이 잘 나타났다. 기사를 아래에 인용한다. 

 

<3대포털에 오른 이 기사에 달린 댓글은 6646개였는데 취재팀이 △재산 기부가 잘한 일이라는 댓글(지지) △재산 기부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는 댓글(비판) △지지와 비판 의견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댓글(중도)로 분류했다. 그 결과 지지(2661개)와 비판(3337개), 중도(648개)로 의견이 나뉘었다. 

 

취재팀은 이 댓글을 먼저 달린 순서대로 10개의 구간으로 나눴다. 그 결과 지지와 비판 의견의 숫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치열하게 경합을 벌였지만, 명시적인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중도' 의견은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하게 감소했다. 1구간에 140개로 18.3%를 차지한 중도 의견은 2구간(765~1443번째)에서 12.1%로 감소했고, 마지막 10구간(5972~6646번째 댓글)에서는 4.6%까지 추락했다. 

 

이는 이 대통령의 재산 기부 행위에 대한 의견이 뚜렷하지 않던 사람들이 타인의 의견에 급격히 동조됐거나 적어도 중도 의견을 밝히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터넷에서 논쟁이 진행되면서 중도적 의견은 줄고, 양 극단의 견해만 남은 셈이다. 이는 인터넷이 토론을 통해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내기보다 자신과 같은 의견을 확인하고 이를 더 공고히 하는 공간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이는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 법대 카스 선스타인 교수는 '리퍼블릭닷컴 2.0'이란 저서를 통해 "인터넷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같은 의견만 보게 하는 경향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선스타인 교수는 개인 블로그를 조사해 이들이 어떤 글을 블로그에 링크하는지 살펴봤는데 90% 이상이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가진 것들만 링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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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석 --위 조사의 질문과 선택답안은 다음과 같다. “선생님께서는 본인의 이념성향이 진보 중도 보수중에서 어느쪽에 가깝다고 보세요? 1) 진보 2) 중도 3) 보수”

 

3-3. 중도의 적들 3 : 좌우 극단화 조장하는 언어의 속성

 

사회과학적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접근같지만 중도적 속성의 억압은 언어의 한계와 관련이 있는 것같다. 모호한 속성을 갖는 중도를 표현할 만큼 언어가 충분치 못하다는 말이다.  

 

어떤 문제에 대한 존재의 판단은 일반적으로 예스와 노, 그렇다 아니다로 표현된다. 그러나 어느만큼 예스이고 어느만큼 노이다, 60%만큼 예스이고 40%만큼은 노이다 이렇게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는 100% 긍정 아니면 100% 부정이다. 그 중간에 있는 수많은 판단들은 선택할수 있지만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언어의 한계로 인한 왜곡의 사례들을 더 찾아보자. 

 

흔히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선인과 악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그처럼 선만 가지고 있거나 악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믈다. 선인은 선을 더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악인은 악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을뿐이다. 또는 특정한 시기에 악한 부분이 드러나면 악인이 된다. 이러한 복잡한 속성을 가진 인간을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극화하는 과정에서 악인과 선인으로 단순화된다.  

 

좌와 우도 예스와 노, 선과 악의 언어적 속성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언어는 어떤 대상을 그저 좌 아니면 우로만 표현한다. 중간은 사상되고 극단만이 남는다. 언어는 늘 일면적이고 전면적이어서 0과 100만을 표현할 수있을 뿐 그 사이의 여러 다양한 선택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기껏해야 ‘중도’ ‘온건’이라는 수식어로 등급을 나눌수 있을 뿐이다. 

 

노무현전대통령이 좌파인가 우파인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라는 기초적인 문제가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이유중 하나가 이같은 언어의 문제이다. 한나라당과 보수는 노대통령을 좌파라 하고 민노당과 진보는 우파라고 한다. 어느 것도 맞지 않다. 정답은 그중간의 어느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출처] 중도에 대하여 3|작성자 on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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