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는 중도가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펼쳐져 활용되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중도의 현장이라는 타이틀 아래 여러 사람들의 중도에 대한 주장 또는 이론을 정리해보려고 했습니다. 우리사회 공론의 마당에 의견을 내놓은 사람들은 주로 대학교수들인데요. 개인적으로 송호근 교수의 중심의 이동이 관심을 끌었고 김진석교수의 우충좌돌론도 흥미있었습니다. 백낙청교수의 변혁적 중도주의도 반드시 집고 넘어갈 문제였고요. 황태연의 중도개혁주의는 자료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최근들어 신문 칼럼과 기사에 수시로 중도가 등장합니다. 이명박정부가 중도실용을 표방한 이후 친정부언론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차원에서 기사가 나오기도 합니다. 아무튼 중도는 이른바 살아있는 현재진행형 주제입니다. 활발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마침 이번주말 세미나에서 중도를 다루기로 해서 시간을 맞춰 부랴부랴 글을 작성해 올렸습니다. 이때문에 미처 정리가 되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5. 중도의 현장

 

5-1. 송호근의 ‘중심의 이동’

 

좌파였다가 우파로 다시 좌파로 양쪽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람이 있을수 있을까. 사상적 철새 또는 낭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다. 그런데 스스로 사상적 기회주의자라고 커밍아웃한 학자가 있다. 그는 권력의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으려한다고 말했다. 늘 그 반대편에 서겠다고 했다. 지식인의 균형추역할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사회학자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이다. 

 

권력을 좌가 잡으면 우에, 우가 잡으면 좌에 서겠다는 것인데 스스로 중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중용의 ‘시중의 논리’ ‘중심 이동의 미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책은 어느편에도 가담하지 않으려는 사람, 말하자면 기회주의자로 분류되는 사람의 해명서이다. 만하임의 개념인 ‘자유부동적 (free-floating) 지식인’이 설 자리는 지극히 좁아졌다. 나는 그 대안으로 중심의 이동을 선택했다. 우파정권이 들어서면 좌파로 이동하고, 좌파정권이 수립되면 우파로 옮겨앉는 것이 지식인의 생리이자 자유인의 행동강령이다. ‘중용’에서 얘기해주듯, 시중 時中의 논리 또는 중심이동의 미학인 셈이다. 지금 이시점에서는 정확한 시대진단과 상황인식을 전제로 ‘새로운 중심’을 세워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참여정부 2년의 '진보정치 진단서'> 서문중에서)

 

송호근의 커밍아웃이 생소해 보인다면 프랑스의 사회학자 알랭뚜렌의 말을 빌어보자. 그는 사회운동을 권력과의 보완관계 속에 자리매김했다. 권력이 오른쪽으로 편향돼 있으면 사회운동은 왼쪽으로, 권력이 왼쪽이면 사회운동은 오른쪽이 제자리가 된다. 

 

그의 이론대로 하면 지난 80년대 한국사회운동이 극좌에서 90년대들어 중도좌파로 변모한 것은 다시 말해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나간 것은 아주 잘 들어맞는 사례이다. 80년대 권력은 극우였으며 90년대 들어 중도우파적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을 쉽게 변화해서는 않되는 지사적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같은 담론이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실제로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오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김일성주의등 좌파논리로 무장한 혁명가들이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었다. 이런 문제를 납득할수 없어 절망 끝에 운동을 그만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송호근의 중심이동의 논리는 이같은 뚜렌의 담론과 닿아있다. 좌파정권에는 우파적 시각으로 비판하고 우파정권에는 좌파적 시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매우 독특해 보인다.

 

그 독특함의 내용을 쫒아가 보자. 좌파정권에서 우파사회운동이 우파정건에서 좌파사회운동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새롭지 않다. 사회운동가들은 좌든 우든 제자리에 서있으면 상황변화에 따라 역할의 크고 작음이 결정된다. 그런데 송호근은 일이 많은 쪽으로 이쪽저쪽으로 옮겨다니겠다는 것이다. 일견 무엇이 문제인가 라며 지나칠수도 있지만 사실은 파격적인 발언이다. 좌파 우파의 본산지인 서구에서도 이같은 유형의 인간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리 저리 자리를 옮겨다니므로 철새이긴 한데 늘 따듯한 곳을 찾아다니는 철새와는 다르다. 권력을 쫒는 철새와 달리 권력의 바깥에 추운 곳만을 찾아다니겠다는 것이므로 윤리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상찬의 대상이 될수 있다. 필자는 송호근의 이같은 입장을 진화된 중도의 한 형태라고 본다. 

 

그러나 문제점도 보인다. 권력의 건너편에 서겠다고 했을 때는 권력과 사회가 일치되는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국적 특수성이 간과돼 있다. 김대중정권 당시 집권야당이란 말이 나왔듯이 정치권력이 사회를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다. 50년만의 정권교체였기 때문이다. 노무현정권 당시에도 강력한 보수언론으로부터 사사건건 발목이 잡혔다. 보수에서 진보로 주류룰 바꾸려고 했지만 성공했다고 볼수 없다. 반세기동안 지배했던 세력의 이념이 정권교체를 계기로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다. 이같이 불완전한 정권하에서도 정권의 건너편에 서는 것이 균형자의 역할일까? 

 

5-2. 김진석의 ‘우충좌돌’ 중도론

 

2004년 7월호 인물과사상 31호에 “‘중도개혁’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특집 글들이 실려있다. 이중에서 인하대 교수 김진석의 글 “‘우충좌돌’하자! 우파근본주의와 좌파근본주의 사이로”가 눈에 띈다. 부제는 “두 극단 사이에서의 ‘긴장’과 ‘진동’”이다.

 

그는 마치 술자리에서 신이 나서 열정적으로 말하듯이 주장을 풀어나간다. 하고 싶은 말이 앞서다 보니 엇갈리고 중첩되기도 한다. 그만큼 하고 싶은 말, 그것은 “우충좌돌”이다. 좌충우돌이 아니고 우충좌돌인 것은 오른쪽 진영을 먼저 치받겠다는 것이다. 그가 약간 왼쪽의 자리에 서있기 것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 

 

<나는 먼저 우측에 부딪치는 ‘우충좌돌’을 제안한다. 그런 다음, 그저 우파와 대립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좌파 근본주의에도 ‘쾅’ 부딪치자. (...) 우파 근본주의와 좌파 근본주의 모두에 부딪치는 일은 그저 미지근한 중도의 길이 아니다. 양극단의 근본주의와 충돌한다는 점에서 중도일수 있지만, 이 경우 ‘중도’는 모호한 관념적 표현이다. 양극단의 근본주의 사이로 가는 과정은 그저 가운데로 비실비실 가는 꼴이 아니라 이리로 쾅, 저리로 쾅, 양쪽으로 위험하게 우충좌돌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9쪽, 22쪽)

 

박노자 진중권처럼 선명한 왼쪽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일목요연하게 사회를 바라볼 수 있다. 그의 글에서 나타난 주장이 논리적으로 어긋나거나 모호한 구절을 찾기 어렵다. 망설임이 없고 분명하다. 이것은 조갑제같은 우파논객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중도파들은 이쪽과 저쪽의 사정을 고려해야 하니 고민스럽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양쪽의 사정을 살펴야 하니 멈칫거리게 된다. 그러니 양쪽 극단에 확실한 입장을 가지고 서있는 사람들보다 논리개진이 더 어려울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양쪽의 자양을 풍부하게 흡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리고 다중으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을수 있는 가능성도 높다. 유시민과 노회찬의 지지율을 비교해 보면 알수 있다. 유시민은 최근 노대통령 서거이후 박근혜에 이어 두번째까지 올라갔지만 노회찬은 지지율이 그 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 길은 그저 똑바로 중간으로 가는 길은 결코 아니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아주 복잡한 길, 아주 꾸불꾸불한 길을 간다. 현재 미국주도의 자유주의가 세계화의 차원에서 여러 갈등을 낳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좌파 근본주의처럼 무조건 ‘자유주의 반대!’라는 구호만 외칠수는 없다. 개인이나 집단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궤적을 송두리째 버릴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농촌을 살릴 방법을 찾아내야한다. 이 얼마나 복잡한 길인가? 그리고 얼마나 성실한 고민을 요구하는 길인가? 그러므로 우충좌돌은 맥빠진 중도는 아니다. 다만 극단적 근본주의와 싸우면서 고민하기에, 이들에게 중도로 보일수는 있다.> (25쪽)

 

<다른말로 하면 소수자와 약자를 보호해야 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장과 경쟁의 규칙을 송두리째 버릴수는 없다. 이것이 딜레마다. (...) 미국에 반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또는 미국에 반대하면서 평화를 말하는 것도 나름대로 매우 중요한 운동이기는 하지만, 마치 그것이 유일한 것인양 말할 필요는 없다.>(22쪽)

 

<현재 한국사회의 갈등의 큰 몫이 양극화된 근본주의의 폭력에서 기인한다면, 우파 근본주의에 대항하면서도 좌파 근본주의에도 대항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아마도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보완하는 방식이 되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서구에서 기획된 ‘제3의 길’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 이점에서 나는 그냥 중도가 아니라, 우충좌돌 중도의 길을 말하고 싶다.> 

 

김진석의 제안은 통쾌해서 술자리에서 들으면 듣는 사람이 신이 날 것같다. 그러나 문제점도 보인다. 그는 ‘이리저리 쾅’의 대상으로 정통 좌우파가 아닌 좌우 근본주의를 설정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여간해서 설득당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므로 김진석의 말처럼 쾅쾅 부딪칠 대상이라 볼수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아닌 좌파 우파에도 그렇게 할수 있을까. 이에 대해 김진석은 한국에서는 우파가 곧 극우란다. 이런 전제하에 중도의 필요성 제기했다. 그렇다면 중도가 아니라 우파 좌파 정립운동에 나서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그는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말하면서 좌파처럼 ‘자유주의 반대’만을 외칠수 없다고 했다. 자유주의를 송두리째 버릴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좌파가 우파를 비판할때처럼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비판이어서는 안되고 그 부정적인 면만을 골라서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의 말이 여기서 엉키고 있다.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그런 입장이 이해가 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자유주의는 근본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쾅쾅 부딪쳐도 될 것같은데 자유주의에 대해서 그렇게 해도 될까? 그는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간극이 얼마나 넓은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같다.  

 

“우충좌돌 중도의 길”을 제안한 김진석의 말의 진정성은 충분히 전달이 된다. 그러나 논리전개가 거칠고 정교하지 못하다. 이것은 김진석의 문제로 보기 어렵다. 중도에 대한 연구성과가 우리 학계에 충분히 적립되지 못했음이 짐작된다.  

 

5-3. 유시민의 “조금좌파”

 

참여정부 시기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던 유시민은 몇 달전 MBC-TV의 100분토론에 나와서 자신은 “조금좌파”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에 함께 출연한 중앙대 진중권 겸임교수가 자기가 좌파고 유시민은 좌파가 아니라고 얘기하자 유 전 장관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진중권 선생은 나를 보고 좌파가 아니라고 하는데 나는 "조금 좌파"거든요.(웃음)”

 

그는 평소에 자유주의자를 저처했었다. 유시민의 그동안의 활동을 보면 “조금좌파”란 중도좌파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고 본다. 

 

누군가가 좌파냐 아니냐라는 주제에 대한 논란은 끝이 없다. 좌파다 아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좌파"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언어구사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유시민은 참여정부 정체성과 관련해 자주 사용되는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용어에는 비판적이다. 그는 최근 참여정부의 정체성과 관련해 "좌파 신자유주의 이런 것은 개그"라며 "대한민국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조크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며 언론을 겨냥해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특히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며 "그런 것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5-4.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주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8월11일 신간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출간을 기념해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보수로 분류되는 분 중에서도 합리적인 분들, 진보로 분류되는 분들 가운데에도 ‘내가 추구하는 진보가 진짜 진보인가’ 성찰하는 분이 있다”면서 “이들의 격차는 좁다. ‘양쪽의 연대가 가능한가’ 보다 ‘얼마나 폭넓게, 얼마나 짧은 기간에 진행될 수 있을까’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한 그의 의도는 이 책에 실려있을 것으로 보이는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에 실린 “87년체제의 극복과 변혁적 중도주의” 제하의 대담글에서 잘 나타나있다.   

 

백낙청은 변혁적 중도주의가 87년체제 극복을 위한 유일한 타개책이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변혁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혁명과는 다른 그러나 아주 근본적인 변화라는 말입니다.” (창비 106쪽)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중도개혁 노선을 강조한다. 


“변혁적 중도주의를 우리 현실정치에 적용하는게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중도개혁노선이 맞습니다. 과격한 진보주의 처방보다 중도주의가 맞는데, 다만 그 중도개념이 남북의 화해협력 및 재통합 과정과 연결되고, 그래서 남북관계의 진전에 대해 과감한 자세를 취하는 중도개혁이면 그게 변혁적 중도주의가 되는 거예요.” (106쪽)

 

백낙청이 중도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남북관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남북관계진전 즉 분단체제극복이라는 대의 수행을 위해서는 진보만으로는 안되겠다. 그래서 깨어있는 싹수있는 보수도 참여시키자. 이런 현실적인 필요와 목표를 위해서 백낙청교수가 ‘중도주의’를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반도의 원만한 통일이 세계적인 근대극복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인 동시에 한반도 주민의 입장에서 근대에 적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중도주의가 필요한 것이고요.” 111쪽 

 

‘변혁적 중도주의’는 한반도 분단체제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변혁’이며, 분단체제 변혁을 위해서는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가 폭넓은 중도세력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근거에서 중도주의이다. 

 

5-5. 임현진 윤성이 이종재의 경우

 

중도에 대한 인식을 높여주는 몇가지 사례들을 소개한다. 임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은 8월5일자 경향신문 기고 “진보정치에 주는 죽산의 교훈”에서 다시 중도의 위상회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볼 수 있듯 한국정치에서 중도적 성격을 갖는 정당의 입지는 매우 취약하다. 제헌국회에서 중도파는 보수우익인 한민당은 물론 좌파세력으로부터도 내몰렸으며, 진보당 역시 자유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운신의 폭이 좁았다고 볼 수 있다.”

 

“근래에 이르러 건전하고 합리적인 좌우를 포괄하는 중도세력이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중도적 성격을 지니는 정당은 중도라는 의미가 지니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하다는 오해는 차치하고라도 ‘꼴통보수’로부터는 좌파로, 급진진보로부터는 ‘사쿠라’로 몰리는 얄궂은 위상을 점유하고 있다. 좌우를 아우르는 사회통합적 중도의 위상회복이 필요한 시점이다.”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서울신문 8월6일자 기고 “예견된 미디어법 파행”에서 중간세력이 없어 투쟁과 대립만 남았다고 말한다. 

 

“미디어법 파행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보다 극한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이념갈등의 구조적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지역갈등은 그나마 갈등 당사자가 영호남에 국한되었고 중간세력도 존재했다. 그런데 이념갈등은 모든 정치세력과 국민들로 하여금 진보와 보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이념적 중도 집단이 있다 하나 정치무관심층이 대부분이고, 이들도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 진보나 보수 가운데 하나를 취하도록 강요받는다. 의미 있는 중간세력이 없으니 그 갈등이 점차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진보와 보수를 사안에 대한 입장과 가치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이를 선과 악의 문제로 포장하니, 둘 사이에 타협은 있을 수 없고 오직 투쟁과 대결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일보 신임편집국장 이종재는 8월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한국일보는 '적극적 중도'로 간다"고 말했다. “중도는 양비론으로 흐르기 쉽다. '가치 있는 중도'가 구체적으로 뭔가?”라는 미디어오늘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 사회는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극단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반대를 위한 반대'는 독자들이 더 잘 안다. 신문은 사회통합 기능도 있는데 언론이 앞장서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신문이 '촛불'을 들고 있으면 안 된다. 과거 민주화운동 하던 시기에는 국민을 앞에서 이끄는 역할이 필요했으나, 지금은 시대의 거울이어야 한다.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해선 안 된다. 독자들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여기 부산과 서울이 있다고 치자. 서울과 수원만 왔다 갔다 하면 부산, 밀양 쪽 소식은 다루지 못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부산 밀양 사이만 왔다 갔다 하면 서울, 수원 쪽 소식은 못 다룬다. 그런데 지금 우리 언론 현실이 그렇다. 예컨대 '가치 있는 중도'는 대전에 터를 잡고 수원과 밀양 사이를 오가는 걸 말한다. 

 

'기계적 중도' '소극적 중도' 모두 반대한다. 우린 적극적 중도를 지향한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얘기할 것이다. 미디어법 예를 들어볼까? 적어도 법안이 지향하는 가치는 맞지만 그걸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국민의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민생법안을 뒤로하고 그렇게 밀어붙여야 했나? 그건 아니다. 우린 1면 톱으로 대리투표 논란 다뤘다." 

 

이런 발언은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살아남기 위한 비굴한 타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중도에 그런 속성이 내재돼 있는 것이 아닐까?

[출처] 중도에 대하여 5|작성자 on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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