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도란 무엇인가 

 

2-1. 좌와 우가 있을 뿐 중도는 없다

 

일반적으로 성질이 상반된 두가지 사물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밤과 낮의 사이에, 흑과 백의 사이에, 선과 악 사이에,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 음성과 양성 사이에, 물질과 정신 사이에, 행복과 불행 사이에, 삶과 죽음의 사이에, 유물론과 유심론 사이에, 자석의 음극과 양극 사이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남성와 여성의 사이에는 제3의 성이 있지 않고 물질과 정신 사이에 중간의 성질을 갖는 것이 없다. 밤과 낮을 이어주는 황혼이나 박명은 있지만 단지 이전 과정의 일시적 특성이며, 흑과 백의 사이에 회색이 있지만 흑과 백만큼의 비중을 갖는 대등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원론이 힘을 얻는다. 세계는 이질적이며 늘 대립되는 두가지로 구성돼 있지 세가지나 네가지로 구성돼 있지 않다. 이원론이 아닌 삼원론은 말자체가 생소하다. 자연계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성같은 생명체는 없다. 미생물 중에는 암수가 한몸 안에 들어있는 경우가 있지만 진화가 이뤄지지 않은 열등한 상태일 뿐이다. 이처럼 두가지 사이에서 또는 두가지 밖에서 그와 대등한 세번째의 것을 찾기 어렵다. 

 

이원론 dualism의 사전적 정의는 “세계가 두 개의 서로 독립된 근원적인 원리 및 요소로 이뤄어진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이다. 대표적 이원론자인 데카르트는 인간존재가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 개의 실체로 구성돼 있다며 물심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2천년전인 그리스 로마시대에 플라톤의 유심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이 맞섰다. 

 

연세대 명예교수인 송복도 “중도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주장이 아니라 ‘사회학의 이론’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실적으로 사람의 행동은 모두 ‘선택’의 과정이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사고며 행동이다. 언제나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직면해 있다. 거기에 ‘중도’는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제3의 것이 있으면 그 제3의 것도 이 ‘제3의 것이냐’, 저 ‘제3의 것이냐’로 나눠져, 거기서 또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한 ‘선택’은 불가피하다.” (한국논단 2005년4월호 <보수와 진보가 있을뿐 중도는 없다>중에서)

 

2-2. 중도는 없지만 중도의 영역은 있다

 

문제는 좌파와 우파도 이원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대상인가이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는 그의 저서 “좌파와 우파”**1에서 “정치에서 모든 것은 좌파 아니면 우파여야 한다”며, “어느 누구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거나 카톨릭일수 없듯이 좌파인 동시에 우파일수는 없다”고 말했다.**2 

 

보비오는 중도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좌파와 우파 사이의 중간영역에 대해 고찰했는데 이 점이 그의 통찰의 특징이다. 중간영역에 대한 연구의 산물로 그는 막연하게 혼용돼온 온건좌파와 중도좌파, 온건우파와 중도우파를 구분했다. 이것은 새롭고 유용해서 중도를 둘러싼 혼돈을 설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3

 

보비오는 좌우 사이의 중간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두가지 가설을 설정했다. 첫째는 중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인데, 이때는 좌와 우가 ‘A 아니면 B’라는 관계를 갖게 되며 이분적이다. 

 

이 경우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 착목했다. 중도지대는 없지만 좌와 우가 갈라지는 지점의 설정이 가능하지 않은가. 이것은 현실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 추상적인 지점이다. 일종의 ‘절대중도’같은 지점이다.

 

여론조사시에 좌인가 우인가 중도인가라며 세 개의 선택지를 내놓으면 중도를 선택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이때의 중도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절대중도’의 성격을 띤다. 이같은 중도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보비오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 좌우에 대한 도피심리의 반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지적이다.**4 

 

두 번째의 가설은 중간을 인정하는 경우인데 자연스럽게 세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좌파와 우파사이에 ‘A도 아니고 B도 아닌’ 동시에 ‘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한’으로 표현되는 중간영역 즉 중도의 자리가 설정된다. 

 

이렇게 설정된 중도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좌파에 좀더 가까운 중도와 우파에 좀더 가까운 중도 즉 중도좌와 중도우로 구분된다. 그러므로 중간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A와 B로부터 독립된 C가 아니고 A와 B의 극성에서 멀어져 성질이 약화된 것임을 알수 있다. 좌와 우가 있을뿐 중도는 없다는 보비오의 최초 발언이나 송복이 소개한 사회학 이론과 어긋나지 않는다. 중도의 영역이 있을뿐 중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도 영역의 설정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편의적이다. 보비오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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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석 --이책의 원제는 좌파와 우파 Left and Right이지만 1998년에 번역출간된 한국어판에는 “제3의길은 가능한가-좌파냐 우파냐”로 개제했다. 

 

**2 주석 --필자의 앞의 글 <진보 보수는 한국사회의 특산품>에서 말했듯이 진보 보수는 과학적 엄밀함을 따져야 할 때는 사용하기가 적절치 않은 용어라고 보고 주로 좌파 우파를 사용했다. 그러나 진보주의 연구팀에서 나홀로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버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큰 틀에서 좌파는 진보, 우파는 보수와 바꾸어 이해해도 될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도좌파 온건좌파같은 용어를 중도진보 온건진보라고 바꾸어 말한다면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좌와 우 대신에 진보 보수를 사용함으로서 생기는 언어적인 혼란은 하등의 쓸모가 없는 것이어서 우려스럽다. 용어상의 작은 오차가 반복 발전되면 나중에는 개념이 엇갈리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주장은 더 이상 하지 않고 별도로 그것이 주는 해악의 사례들을 모으고 있다.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밝혀서 보여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3 주석 --‘온건’과 ‘중도’의 구분이 우리나라나 외국의 학계에서 어느 정도 수용되고 있는 것인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다. 

 

**4 주석--이같은 조사로 인해 도출되는 부정확한 값은 오히려 혼돈을 야기할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같은 문제점을 피하는 조사방법도 있다.

 

2-3. 이념의 여섯가지 구분

 

중간지역을 인정한 두 번째 가설을 진전시켜보자. 중도의 바깥에는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왼쪽은 좌파의 영역인데 이것은 다시 중도파를 지향하는 온건좌파와 중도파를 적대시하는 극좌파로 구분된다. 우파도 온건우파와 극우파로 갈린다. 그러므로 보비오의 스펙트럼를 거쳐 나타난 이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극좌파-온건좌파-중도좌파-중도우파-온건우파-극우파”

 

좌파 중도파 우파등으로 삼분된 이념은 다시 각각 이분되어 모두 여섯 개가 됐다. 중도는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중도의 영역을 관찰하여 과학적인 구분을 가능케 한 것은 보비오 연구의 성과로 보인다. 

 

여기서 온건좌파는 일반적이고 평균적이며 양적으로 다수이므로 수식어 없는 좌파라고 불러도 될 것같다. 온건우파도 다름없다. 

 

2-4. 중도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나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중도파라는 그릇에 들어있는데 이때 두 개의 중도파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중도파라는 그릇 안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중도좌, 중도우는 중도파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하며 서로 넘나들 수 있으므로 함께 실천적 정치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같지만 역사상 그런 정치결사체는 찾을 수 없다. 미국의 경우 중도당 centrist party이 있지만 간판만 있을뿐 실체는 미약하다. 이와 성격이 같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의 해방공간에서 중도좌파 여운형이 주도한 좌우합작도 실패했다. 

 

중도좌 중도우 사이의 거리가 멀지는 않지만 각각의 뿌리가 다르다. 색깔이 옅기는 하지만 붉은 색과 파란색처럼 분명 다른 색이다. 그리고 상황변화에 따라서 경계선을 넘기보다 왼쪽과 오른쪽의 극점 방향으로 이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즉 극성의 원심력이 작용한다. 노무현과 이명박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우진, 좌진하여 중도에서 만나는 것같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눈에 뜨이는 이유다.   

 

이 지역은 원심력뿐 아니라 구심력도 공존한다. 중도파로서의 정체성은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이 두가지 힘의 작용에 의해 두 중도파들은 왼쪽 오른쪽을 그네처럼 넘나든다. 양쪽 사이에 경계선이 있기는 하지만 각각이 속한 지역에 대한 충성도가 높지 않다. 

 

이들은 뚜렷하지 않은 정체성 때문에 독자적인 정치적 결속력의 힘이 약하고 늘 좌파와 우파 양진영에 이끌리며 동원된다. 신념과 지조, 줏대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헐렁한 오합지졸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다. 이 중도지역에 바람이 불어 이들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전체판이 뒤집어진다. 좌파와 우파중 어느쪽이 정권을 잡더라도 그들 각각의 힘보다 더 강한 영향력이 --적어도 선거때는-- 이들 중도파에서 나온다. 

 

미국의 스윙스테이트(그네 주)는 선거에서 중도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하이오주를 중심으로 미국 중서부의 19개주를 스윙스테이트라고 하는데 이들 주의 표심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에 따라서 예외없이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가 결정돼 왔다.  

 

온건좌파(우파)와 중도좌파(우파)의 관계는 연구과제이다. 온건좌파가 중도좌파로 건너오는 경우 이것이 소위 ‘제3의 길’로 불린다. 온건우파와 중도우파가 협력하는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우파연합을 이뤄내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을 당선시킨 중도우파 UDF(프랑스민주연합)와 온건우파 RPR(공화국연합)의 경우를 들수 있다. 

 

최근 들어 한국사회에서 좌우이념갈등이 심해지자 중도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중도는 스스로의 독자적인 존재감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고 좌우진영의 변화에 따라 필요성을 인정받는 종속변수이다. 뒤에서 실펴볼 김진석의 우충좌돌론, 백낙청의 변혁적 중도주의등을 보면 중도의 역할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볼 수 있다. 

[출처] 중도에 대하여 2|작성자 on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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