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적들”이라는 생소한 소제목 아래에 여섯가지 사례를 모았습니다. 앞의 글에 이어서 세가지를 더 소개합니다. 이것은 좌우갈등이 격화되는 이유와도 일치해서 그 타이틀로 다루는 것이 더 적절할 것같지만 여기서 시론적으로 다루어보았습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반대로 “중도의 친구들”을 다루어 비교가 되도록 했습니다. 중도를 주제로한 여러 자료들을 보았지만 본고와 같은 시각에서 바라본 글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미숙하고 부족한 글이지만 앞으로 보완할 것을 예정하고 여기에 내놓습니다. 

  

3-4. 중도의 적들 4 : 색깔론과 빨갱이 적출이 횡행하는 사회 -6.25의 유산  

  

좌우대립 격화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동족 상잔의 6.25 전쟁이다. 수백만명의 사상자를 남긴 민족의 대참화였다.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한 이념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남과 북은 각각 적대적인 체제의 이념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런 중에 남한에서는 절멸된 한쪽이 30여년만에 자생적으로 복원되면서 특별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6.25 참화를 통해 정당성을 갖춘 반공극우와 새로이 짧은 시간에 스스로 힘을 결집한 진보 좌파가 강대강으로 맞부딪치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중도가 설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3-5. 중도의 적들 5 : 주체의 강화 -설경구와 한석규를 줗아하는 이유

    

철학적으로 우파의 논리적 뿌리에 자양분을 공급해주던 주체의 기능에 변화가 발생했는데 이같은 현상은 한국사회의 특유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체란 생활어로 ‘곤조’와 뜻이 흡사하다고 본다. 여러 억압기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기다움의 비타협적 발현이 곤조라고 한다면 주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체는 현실적인 불이익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분출되곤 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다. 21세기에 한국인에게 주체의 강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별도로 연구대상이다. 

    

해외에 오래 거주하다가 귀국한 어떤 이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한국에 오랫동안 부재했음에도 다른 사회의 문화와 비교할수 있기때문에 해외동포들은 한국사회를 비추어주는 거울같기도 하다.

  

“외국에 한국 사람들이 가슴에 비수를 한자루 품고 다니는 것같다. 그리고 어느 때엔가 그 칼을 꺼내에서 무참하게 어느 사람의 등을 찍는다. 문제는 별로 그렇게 까지 할만한 이유라고 보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한다.”

    

이런 장면은 어디선가 본 것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바로 설경구와 한석규가 각각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여러 영화들에서다. 이들 두명의 배우는 한국인 특유의 ‘곤조’를 탁월하게 연기한다. “에이씨~”로 시작해서 강력한 뉘앙스의 말과 행동이 뒤따른다. 여기에서 관객들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공감한다. 다른 나라 영화에서도 이같은 장면을 볼수 있을까? 이들 두 주인공의 공격대상은 영화의 공공성 때문에 대체로 악인으로 설정되지만 현실에서의 공격대상은 선과 악을 넘어 이해관계로 결정된다. 

  

필자는 이런 현상은 주체의 강화로서의 ‘곤조’의 발로라고 본다. 주체의 강화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매우 일반적이다. 그것은 좌우 양쪽에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서 좌우갈등이 격화하는데 큰 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우파의 속성이던 주체가 좌파진영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놓치면 안된다.

 

사실 한국인은 주체성이 매우 강하다. 그래서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나온 것이 아닐까? 물론 두 개의 주체는 다른 것이지만... 영어로 표현하면 차이를 잘 알수 있는데 subject와 juche가 된다. 

    

예술과 창작의 자양분이 되어주는 주체는 한국인의 DNA에 풍부하게 있어서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출신으로 세계 정상의 반열에 선 아티스트들이 많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주체는 한국인의 특성을 넘어 현대성의 한 속성 아닌가. 현대인에게 주체가 강화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닐 수 있다. 주체와 현대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찾지 못했지만 별도의 장에서 연구성과가 나와있을 것같다.

    

3-6. 중도의 적들 6 : 중도의 구조적 한계

  

중도는 시스템상, 생래적인 구조상, 어떤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 중도의 최대 문제점은 자연계의 속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있는 현재의 구도는 오랫동안 검증된 것이다. 정권교체를 통해서 결과적으로 국민들이 양쪽을 모두 겪고 비교해보고 갖을 수 있다. 장기적으로 중도가 원하는 것을 모두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견제와 비판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도 부합하고 음과 양이라는 생명의 질서에도 조응한다. 

  

중도의 문제점이라면 중도안에 좌와 우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만 보면 교체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연의 속성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 

    

지금 한국사회에서처럼 좌우갈등이 격화되었을 때 그 대안으로 일시적으로 중도의 자리가 찾아진다. 이런 때 제한적으로 중도의 기능을 인정할수 있다. 

  

본질적으로 중도는 좌와 우가 제 역할을 못하는 비상국면에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좌와 우가 바로서면 중도는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된다. 좌우는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되 선의의 경쟁이라는 한계를 넘으면 안된다. 그것은 골육상쟁같이 존재내적인 갈등이기 때문이다. 

    

대립격화의 원인을 찾아서 이것을 제거해 나가려는 사회적 노력이 본질적인 해결방안이다. 그것에 뚜렷한 한계가 있음이 확인될 때에나 중도의 역할이 찾아질 것이다. 

  

4. 중도의 친구들 : 중도의 속성을 뒷받침해주는 사례들

    

편향을 불편해하며 중심으로 돌아오려는 균형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은 중도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로 중도의 속성을 뒷받침해주는 방향으로 이용될 만한 몇가지 사례들을 소개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회운동가는 좌파 운동권에 몸담고 있는데 자신이 만약 북에서 태어났다면 자유주의 우파운동을 하다가 수용소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떻게 봐야할까? 반골정신이라해야 할까, 청개구리 심리라 해야할까? 

    

버스를 오른쪽으로 급회전하면 승객들은 왼쪽으로, 왼쪽으로 꺽으면 승객들은 오른쪽으로 몸이 쏠린다. 운전사는 권력, 승객은 사회운동으로 비유해볼수 있다. 늘 버스를 (사회를) 중심에 놓으려는 균형점에 놓으려는 집단의식의 발로이다. 

  

프로이트는 꿈은 반대라고 했다. 무의식이 의식을 보완하는 현상이다. <꿈의 분석>을 보면 행복한 사람은 나쁜 꿈을, 불행한 사람은 좋은 꿈을 꾼다. 그래서 흔히 "꿈은 반대"라고 말하곤 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존재의 균형잡기로 설명한다. 일상을 담당하는 의식에 대해 무의식의 균형잡기로 설명한다. 존재는 생래적으로 균형으로 향한다.

    

다음과 같은 필자의 경험에 동감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좌파로 보이는 사람에게 “당신 좌파지?” 우파로 보이는 사람에게 “당신 우파지?”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화를 벌컥낸다. 자기는 좌파가 아니다. 자기는 우파가 아니다. 자기는 옳기 때문에 좌나 우와같이 한쪽만 담당하는 편협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옳기 때문에 좌우를 다 갖고 있거나 좌우를 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보면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사람이 있으니 자신이 늘 중심에 있다고 착각할 만하다. 이런 사람을 종종 만날수 있다. 

  

이것은 이념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할 근거가 되어 준다. 좌와 우가 편향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육을 통해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좌우가 편향이라는 인식은 아무런 교육없이 단지 이 말의 껍데기에 묻어있는 어떤 것들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좌우는 편향이 아니다. 좌에는 유물론 우에는 유심론과 같이 2천년 묵은 인류의 지혜가 표현된 것이다. 

    

조갑제는 보수-진보의 대립이 아니라 애국자와 매국자의 대립이라고 말했다. 자신을 애국자의 자리에 놓았는데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논의는 그 자리에서 끝난다. 

  

대체로 좌파보다는 우파가 좌우의 틀안에 넣어져 재단되는 것을 불편해 한다. 자유주의자들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좌우라는 틀을 이용해 자신을 재단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늘 중심에 서려는 심리현상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우리는 늘상 청개구리가 되려고 한다. 좌파를 만나면 우파가 되고 싶고 우파를 만나면 좌파가 되고 싶어진다. 술자리에서 자유롭게 토론이나 언쟁을 할때 이런 현상은 특히 잘 나타난다. 왜 그럴까. 못말리는 자유주의자의 속성인 걸까.

 

어떤 강력한 주장을 접하면 그것에 빨려들어가기보다는 반발심이 마음의 기저에 꿈틀거린다. 그리고 그것이 갖지 않은 다른 것에 생각이 향한다. 한쪽으로의 질주가 낳게되는 빈공간의 결핍을 불안해 한다. 이 비어있는 곳, 결핍을 보충해서 완성으로 나가려는 무의식적 본능이 작동한다.

 

자기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오른쪽에 서고 싶고 자기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왼쪽에 서려고 한다. 보충을 해서 완성하려고 하는 강력한 무의식이 작동한다. 이런 심리상태에 있는 사람은 여론조사를 하면 자신은 늘 중도라고 대답한다.  

[출처] 중도에 대하여 4|작성자 oniva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