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만난 천안문사건 주동자

 

  

알랭 뚜렌 교수는 사회운동 사회변동론의 세계적인 석학이다. 나는 지난 92년 그가 65세 되던 해에 제자로 들어갔다. 그 이후에도 강의는 계속했지만 65세 정년이 되는 해까지만 학생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당시 한국 유학생들 몇명은 그의 제자로 입문하려고 시도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런데 나는 그와 인터뷰도 하지 않고 합격증을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석사학위도 없이 박사준비과정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내가 그의 제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내가 준비한 프로제(연구계획서)때문이었다. 내 프로제에는 80년대 한국사회운동을 주제로 공부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의 문하에는 이미 그로부터 4년전인 88년에 70년대 한국사회운동을 주제로 공부하고 돌아간 한국유학생이 있었다. 그뒤를 이을 사람이 필요했으나 92년에 80년대 사회운동을 하겠다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격동의 80년대로부터 너무 가까이 있었던 시기였기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격렬했던 80년대 사회운동은 전세계의 사회운동 연구자들에게 큰 관심사였다. 

 

뚜렌은 원로 석학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중 선배는 벌써 중견교수가 되었다. 그들을 모두 합해서 뚜렌학파라고 불리었다. 보드리야르나 데리다만큼은 세가 세지 못했지만 프랑스 학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뚜렌학파 교수들이 모두 모여 세미나를 했는데 이때 나도 뒷자리에 앉았다. 내가 다녔던 EHESS는 빠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또는 빠리사회과학대학원으로 불리는데 박사과정만 있는 사회과학 전문과정으로 자크 데리다도 이 대학의 교수였다. 이 학교에서 가장 넓은 강의실에서 열린 뚜렌 학파 세미나에는 가장 선배인 50대의 튀니지 출신 교수부터 나와 같은 연배였던 이탈리아출신의 30대 막내교수까지 10여명이 모여 앉아있었다. 강의실은 이 학교에서 가장 넓고 채광이 잘되는 좋은 교실이었다. 교수들은 길다란 미음자의 책상에 둘러 앉았고 뒷자리에 다시 몇십명의 학생들이 방청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삼성 이병철회장이 소집한 어전회의를 연상케 했다. 당시 논의 내용은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 강의실의 풍경은 뚜렷이 뇌리에 남아 있다. 

  

그가 강의하는 모습은 마치 교향악을 연주하는 지휘자 같았다. 처음에는 낮은 어조로 말하다가 흥이 나면 목소리가 점차 높아진다. 그리고 절정에 이르면 자리에 벌떡 일어나서 의자 뒤를 왔다갔다 하면서 소리높여 기염을 토했다. 

  

토론중에는 좌정한 교수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먼저 장년의 맏형교수가 대답을 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해주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어서 다른 어떤 교수의 대답에는 말같지 않은 말이라는 듯 고개를 홱 돌려 외면하면 그 교수는 찔끔해서 움추려든다. 그리고 그가 가장 애제자인 이탈리아출신 35세의 막내 교수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부드러운 어조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라고 묻는다. 그는 전혀 위축된 표정을 짓지 않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뭐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 뚜렌은 ‘바로 그거야!’라는 듯이 득의의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다른 교수들을 바라본다. 그렇다고 막내교수가 선택받은 왕세자같이 오만했던 것같지는 않았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이 장면이 마치 연극처럼 나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알랭 뚜렌은 대단히 엄격하고 권위적이어서 이런 사실은 프랑스 국민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언젠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그 호랑이 교수님의 얼굴이 커다랗게 나타나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땡땡이 치다가 단속교사에게 걸린듯이 뜨끔했다. 그는 당시 시위사태에 대한 코멘트를 하기 위해 나왔다. 인터뷰어는 생클레어라는 유명한 여기자였다. 한국의 MBC격인 TF1 방송의 저녁 메인뉴스 진행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작은 방송사고가 났다. 인터뷰중에 기자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게다가 그의 질문이 말같지 않다는 듯이 묵살해버리고 자기 말만 이어나갔다.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지는 생클레어의 모습이 그대로 화면에 드러났다. 

  

뚜렌학파 어전회의 세미나의 관객석에 앉아있었던 박사준비과정 학생들중에는 나보다 1년 먼저 들어온 중국유학생이 있었다. 

  

그는 89년 천안문 사건의 주동자중 한사람인데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북경대학을 나왔다고 알려져있었다. 키가 크고 웃을 땐 잇몸이 많이 보이는 친구였다. 뚜렌의 제자교수들 아래 등록된 박사과정 학생들은 통합해서 정기적으로 학습을 위한 세미나를 했다. 이 때 그는 1년후배들 모임에서 제법 선배역할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와 나는 서로 어색하고 친해지기 어려웠다. 당시의 내가 납득이 안되고 의아했던 것은 북경에서 자유주의운동을 이끌던 그 친구와 서울에서 북한 서적을 펴내고 도망나오듯 피해나온 내가 어떻게 같은 교수 아래에서 만날 수 있는가하는 점이었다. 그것도 프랑스 사회학계의 거목이자 사회운동론의 세계적인 석학을 알려진 교수의 문하에서. 80년대 한국사회를 가치면서 사회운동은 좌파의 전유물인듯이 인정되어왔던 터여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언젠가 그 친구에게 차나 한잔 하자고 제의해서 카페에서 둘이 만났었다. 그때 대화중에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최근 등소평의 우경화정책으로 인해 중국이 자본주의화되고 있는데 너는 이제 만족하냐? 이에 대해서 그는 이같은 변화는 해안의 대도시들에만 해당되는 것이며 여전히 중국의 내륙지방은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프랑스정부에서 장학금이 끊겨 생활이 어렵다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걱정했다. 

  

당시 천안문 사건의 주동자들중 수십명의 학생들을 미국에 정치망명객으로 받아주었다. 그런데 그중 몇명이 프랑스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그뒤 중국의 급진적인 우경화로 이들의 정치적 존재가치는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때에 그 친구의 장학금도 끊겼다. 

 

알랭 뚜렌 교수가 좌파의 나라에서 우파운동을 했던 그와 우파의 나라에서 좌파운동을 했던 나를 동시에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는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터득하게 됐다. 그 즈음에 출간된 뚜렌 교수의 저서 "현대성비판"을 뒤적이다가 책의 뒷부분에서 몇줄을 찾아냈다. 알고보면 단순한 구조의 말이지만 당시의 나에겐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이루게 했다. 그 귀절을 원문 그대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내용은 이런 것이다, 사회운동은 늘 사회의 균형을 위해 기능하므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사회에서는 그 반대쪽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권력이므로 사회운동은 늘상 권력의 반대쪽에 서게 된다. 좌파정권에서는 오른쪽에 우파정권에서는 왼쪽에... 뚜렌의 눈에는 북경에서 온 그와 서울에서 온 내가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같은 뚜렌의 인식은 90년대 들어 시민운동이 대두되고 기존의 민중운동이 쇠락해져가는 상황에 절망하고 있던 한국의 80년대 운동가들에게 큰 도움이 될 만 한 것이었다. 그의 사회운동 법칙에 따르면 극우정권에서 극좌운동이, 중도우파 정권에서는 중도좌파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의 전환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지사적인 운동가들에게 이런 교훈은 쉽사리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같기도 하다. 

 

이같은 사회운동의 혼란은 한국만 겪는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북경대 출신의 그 친구와 같은 중국의 자유주의 사회운동가들도 비슷한 혼돈을 겪지 않았을까. 중국 격동의 역사속에서 같은 이름의 "천안문사건"은 수차례 일어났다, 그중에 가장 뒤의 것인 89년 천안문사건은 중국을 개방과 자유로 이끌기 위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이미 등소평도 그쪽으로 끌고 나가려했었던 것인데 그들의 사회운동은 조금 성급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이 원하는 개혁이 충분히 이뤄진 지금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무 우경화되어 빈부격차등 사회문제가 심각해지는 중국에서 이제는 다시 좌파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 외국에서 망명객으로 있어야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그들은 모두 조국에 돌아갔을 것같다. 잇몸이 유난히 두꺼웠던 그 키 큰 친구는 지금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써보려했지만 이제서야 썼습니다. 어떤사람... 시리즈를 이어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20년 묵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네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