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09/08/26 

  

중도 개념은 부적절…진보, 보수 취하는 실용이 있을 뿐 

 

중도와 실용은 뭐가 다른가. 중도라는 개념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와 보수의 중간에서 어정쩡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책과 보수정책을 실용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쓸 수 있는 것이 합리적 진보이기 때문에 중도라는 개념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진보지만 극단적이지 않다는 뜻으로 중도진보라는 말은 있는데 그냥 중도라고 말하는 것은 좀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고전적인 진보의 노선이 오늘날 사회투자 이론 등으로 발전했다고 해도 이는 여전히 진보일 뿐 중도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은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실용적 진보, 합리적 진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참평포럼 특별강연 - 시민주권사회 위한 참여운동 펼치자 2007년 6월 2일 ‘21세기 한국, 어디로 가야 하나’를 주제로 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평가포럼 월례강연 전문을 주제별로 정리한 글> 중에서 

  

지난주말 세미나가 끝나고 강권찬팀장님께서 노대통령이 중도에 대해서 남긴 말씀이 있다고 귀띰을 해주어서 찾아봤습니다. 진보의 미래 사이트 자료실에 올린 글들을 검색했더니 2007년 6월 2일 참평포럼 특별강연에서 하신 말씀중에 위와 같은 구절이 발견됐습니다. 

  

위의 글에서 노무현대통령이 “중도라는 개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평소 진보의 가치를 누구보다 신봉해온 분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귀결은 진보의 사상”이라고도 했습니다. "진보주의자 노무현"을 부정하는 사람이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도 노대통령을 가장 잘 아는 사람중 하나인 이정우 교수는 조봉암과 함께 노대통령을 “중도파”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이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같습니다. 

  

이정우교수의 글 "중도파의 비극, 조봉암과 노무현"이 필요한 분은 여기를 방문해 보십시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7281944311&code=990303  

  

노대통령의 인용문 중에서 키워드는 “중도와 실용” “합리적 진보” “실용적 진보” “중도진보” “(그냥) 중도” “고전적 진보”등입니다.

    

“합리적 진보”와 “실용적 진보”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고 “진보와 보수의 중간에서 어정쩡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책과 보수정책을 실용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쓸 수 있는 것”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여기서 “실용”은 진보 보수정책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중도진보”에 대해서는 “다만, 진보지만 극단적이지 않다는 뜻으로 중도진보라는 말은 있는데 그냥 중도라고 말하는 것은 좀 안 맞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말이 중요한데요. 중도는 적절하지 않은 개념이지만 중도진보는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노대통령의 위의 글은 그 뜻이 아주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데 그 원인이 중도 개념의 속성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는 저의 표현방법으로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중도는 없지만 중도는 있다. 즉, 중도라는 개념은 없지만 중도라는 범위는 있다.” 이런 모순어법적인 사실을 표현하다보니 노대통령뿐 아니라 누구라도 말이 뒤꼬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중도는 없지만 중도진보(중도좌파), 중도보수(중도우파)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의 언어생활에서 중도라 할때 그 의미는 위의 세가지중에 하나입니다. 다들 편의에 따라 골라서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도라는 말을 보면 그것이 중도좌파인지 중도우파인지 절대중도인지를 구별해서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야 뜻이 엉키지 않을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실체가 드러난 것이 아닐까요? 이정우교수가 조봉암과 함께 노무현을 중도파라고 했을 때 중도는 무엇일까요? 또 이명박대통령이 중도실용을 말하는데 이때의 중도는 무엇일까요?

  

두 대통령을 규정한 중도라는 텍스트는 같지만 콘텍스트는 다릅니다. 그것은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일 것입니다. 중도라는 말을 무심히 쓸 것이 아니라 이 세가지중에 어느 것인지 밝히며 사용하자는 켐페인이라도 벌여야할 것같네요. 결국 용어의 정의가 정립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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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용어정의의 문제가 우리에게 끼치는 혼란은 현재진행형입니다. 8.15 경축사중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강조한 발언을 소개합니다. 

   

“분열과 갈등을 뛰어넘어 화합과 통합의 구심력을 만들어내려면 중도 실용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중도는 좌와 우의 어설픈 절충이 아닙니다. 중도는 대한민국을 이끌어왔던 헌법 정신, 즉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키려는 관점입니다. 중도는 기계적 평균이 아닙니다. 중도는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중도는 미래를 향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역사의 길목을 선점하는 것입니다. 중도는 국가 발전이 국민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위민(爲民)의 국정 철학’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너무 쉽게 둘로 갈라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우리의 삶을 메마르고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중도실용은 우리가 둘로 나누어보았던 자유와 평등, 민주화와 산업화, 성장과 복지, 민족과 세계를 모두 상생의 가치로 보자는 것입니다. 녹색성장이야말로 이런 중도 실용의 가장 전형적인 가치이자 비전입니다.” 

  

이명박대통령은 중도실용을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키인양 말합니다. 노무현대통령은 중도개념이 부적절하다고 말했던 것과 비교가 됩니다. 그런데 이정우교수는 노무현이 진정한 중도파라고 말했지요. 

  

여기서 중도라는 용어는 이미 정치적 용어가 되어있습니다. 이 용어의 본뜻은 이명박의 좌진정책, 노무현의 우진정책입니다. 중국에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중원을 차지해야 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중도를 차지해야 합니다. 국민의 40%가 스스로 중도라고 생각하니 정치인들도 중도성향의 표를 쫒아 가운데로 뛰어 나오려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명박의 중도는 한나라당의 기반인 극우파에서 벗어나서 가운데로 나오겠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집토끼는 놔두고 산토끼 잡으러 나온 것입니다. 이정우교수가 말하는 노무현의 중도는 "진보 근본주의"를 떨치고 가운데로 나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가 제3의 길입니다. 진보의 미래 3권 프로젝트의 결전장은 제3의 길이 될 것같네요. 전명혜선생님께서 이미 토니 블레어를 통박한 글을 보면서 결전장이 여기가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잡은 "중도에 대하여" 주제의 글의 결론쪽에 쓰려고 했던 내용인데 생각나는대로 먼저 올렸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을 새로 붙였습니다.

[출처] 중도에 대하여 6(완)|작성자 on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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