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보수가 세계 이해의 키워드임을 인식한 것은 노무현의 비범한 인식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의 인식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주위의 도움을 받지 못한 것같다. 이념 분야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매우 미흡한 것도 그 원인이라고 본다. 그는 또한 연구자 이전에 정치인이어서 정치적 확신으로 인한 편향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혼란을 지적해 본다. 

 

“보수는 가치 이론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왜 보수냐 했을 때 철학적인 기초가 없습니다. 그 보수, 보수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놓은 걸 본 일이 없어요. 그냥 이대로 가자, 이대로 가자인데 … 우리 한국처럼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회, 풀어야할 문제가 많은 사회, 청산해야할 잔재들이 이렇게 많은 사회를 두고 이대로 가자니까 …” (206쪽) 

 

위와 같은 말이 참평포럼 연설에서도 보인다. 보수는 "강자의 사상, 기득권의 사상", 진보는 "약자의 권리, 힘 없는 사람의 연대와 참여 존중"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진보가 옳다는 판단이 개입돼 있다. 

 

진보 보수 그 자체는 가치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더 진보적일수록 좋고 더 보수적일수록 나쁘다는 것은 외눈박이 논리이다. 그것들은 모두 옳은 것이어서 각각 정당한 가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억압할 때 평가가 발생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겪었듯이 보수가 부당하게 진보를 억압할 때 옳고 그름의 판단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진보를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국가보안법과 그것에 의존해 있는 세력들이 나쁘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런 지점이 사회운동이 설자리이기도 하다. 

 

“진보적 민주주의라야 진정한 민주주의이다.”(111*쪽)라는 말은 지지자들에게는 통쾌하고 멋진 말로 들린다. 이와 비슷한 언설도 있다. “보수도 건강한 보수라면 이미 진보이다.” 좌파를 표방하는 어느 유명한 논객의 이런 말은 문학적인 수사일뿐 개념상으로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보수는 열등한 것이어서 그것의 최대치가 진보의 최소치에 닿아있는 것일까? 보수가 대오각성할 때 비로소 진보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보수는 진보의 발바닥 아래에 있다는 식의 논리다. 이런 발언들은 지지자들을 결집시킬 수는 있지만 건너편 진영을 설득할 수 없다. 좌파 논객이라면 몰라도 대통령은 진보적 민주주의 뿐 아니라 보수적 민주주의도 민주주의의 절반임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나 사회는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사이의 어느 한 지점에 놓여있다. 그중에 중도진보주의자나 중도보수주의자는 각각 건너편에 있는 보수와 진보를 조금씩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어느 한쪽이 옳고 어느 한쪽은 그르다는 주장은 진영논리에 불과하다. 

 

리영희선생은 새는 두개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이것은 진보가 억압받고 있을 때 보수에게 던진 말이다. 그뒤에 두번에 걸친 집권을 거친 지금, 이 말을 이제 진보들도 다시 되새겨 봐야 한다. 보수에 대한 지나친 비하는 우리사회의 절반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세력을 부정하여 이 사회를 또다른 불균형에 빠뜨린다. 결국 제 눈 찌르기와 같다. 어느 한쪽이 태생적으로 나쁘거나 옳거나 한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다른 쪽을 억압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때 비로소 옳고그름의 판단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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