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좌에서 극우로 김영환 이야기

 

  

우리나라 80년대 운동권의 신화적인 인물이었던 김영환씨는 매우 흥미있는 연구대상이다. 그는 한국학생운동권에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소개한 책자 강철서신의 저자였다. NL(민족해방파) PD(민중민주파)로 나뉘어진 좌파운동권에서 NL의 창시자 또는 거봉이라 할만하다. 그가 사람들을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90년대초이다. 북에서 보내준 잠수함을 타고 평양에 갔다 왔다. 007영화의 한 장면같다. 우리 사회에는 정말 별 일이 다 있다. 그런데 그가 세 번째 놀라게 했다. 월북이후 180도 전향해서 좌파의 진지에서 동료들을 이끌고 나왔다. “뉴라이트”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다.

  

주체사상의 대부격인 김일성대학 총장을 역임했던 황장엽도 비슷한 경우다. 그도 90년대 남한으로 망명한 뒤에 김정일정권 타도의 선봉에 서있다. 외국에서도 이같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90년대 프랑스 대통령선거때 극우파가 15%씩을 얻었는데 그중 상당수가 공산당 출신의 표라고 한다. 

  

극좌에서 극우로 이동하게 만든 동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극과 극은 통하는 걸까? 이에 대한 정치적인 분석은 이미 나와있을 것같아 여기서는 인문적인 접근을 해보려한다. 

  

김영환은 젊은 시기에 흔히 겪는 실존주의 열병을 겪을 시간도 없었던 것같다. 이미 고교시기에 자유센터에 가서 반공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영화를 보고 거꾸로 인식전환을 이뤘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뒤에 북한을 남한사회의 대안으로 삼고 외눈박이처럼 한쪽 눈으로만 보고 살아왔을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일목요연하게 세상이 잘 보일수 있다. 이론가로서 좌고우면 안해도 되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좌우 균형을 잃은 인간존재는 불안정한 상태였을 것이다. 비타민중 어느 하나가 결핍된 사람에게 병증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김영환이나 황장엽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 당원들 그들은 모두 극좌였다. 그들처럼 편향된 의식을 가지고 이 세계를 살기에 현실적인 생활인으로서 매우 불편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이상적인 평등주의자이고 사회정의를 우선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인지상정상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가 작던 크던 존재내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런 억압이 쌓이고 쌓여서 어느 순간에 극적인 변화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듯이. 

  

김영환에게도 이같은 변화가 찾아왔다. 이론과 관념으로 익힌 북한과 직접 목도한 북한과의 큰 차이가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래서 비워진 절반의 부분에 굉음을 내며 절벽이 무너지듯이 채워지는 계기가 됐던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의 저서 “꿈의 분석”을 보면 꿈은 반대라고 한다. 무의식은 의식의 방향과 반대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존재의 균형잡기로 설명한다. 이같은 균형을 유지하려는 힘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존재를 다른 쪽으로 끌어내는 동력이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존재적인 현상이다.  

  

김영환 황장엽등이 극좌에서 극우로 이동한 사람들이라면 드물지만 극좌와 극우를 동시에 한 존재에서 품었던 사람들도 있다. 김일성이나 폴포트가 그렇다.(어떤 사람 6번글 참조) 이들은 모두 자기 존재의 내습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폴 포트와 김일성 

 

 

4월15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폴 포트는 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한 대량학살중 하나인 킬링필드의 주범이다. 그는 75년부터 79년까지 크메르 루주 지도자로 군림하면서 농민천국과 급진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도시인들을 농촌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사유재산과 종교의 자유를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개조'라는 미명 아래 과거 론놀정권에 협력한 지식인은 물론 부녀자 어린이등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백만명을 학살했다. 

 

본명은 살로스 사르. 출생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28년 프놈펜북부 콤퐁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40년대 반프랑스 저항운동에 참가했고 49년 프랑스 유학중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했다. 

 

53년 귀국후 사립 학교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75년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며 친미 성향의 론놀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79년 베트남의 침공으로 하야한 뒤 크메르 루주를 이끌고 북부 산림지대에 피신했다. 80년대말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사실상 크메르 루주를 이끌어왔다. 

 

그와 같이 압제없는 인간적인 사회를 지향한다는 공산주의자가 어떻게 해서 다름아닌 제 동포 전인구의 4분의1을 죽이는 엄청난 비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일까. 

 

우선 그에게서 관념적인 또는 이상주의적인 면모가 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폴 포트는 부농 가계 출신으로 베를렌느의 시를 음송하기를 즐겨했고 불교적인 평온에 잠겨있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면이 자신의 극좌적인 한계를 보완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극좌적인 성향을 증폭시키는 쪽으로 작용한 듯하다. 다시 말해 현실과 과학을 중시하는 공산주의의 덕목을 저버리는 쪽으로 작용한 듯이 보인다. 

 

극좌나 극우는 늘 건너편 상대방에 대한 심각한 훼손과 결핍을 의미한다. 폴 포트의 극좌는 이처럼 좌파의 덕목인 정의의식만이 지나치게 전면화되었을 뿐 조국의 동포들에 대한 사랑같은 우파의 교훈이 결핍된 것이다. 

 

우리는 폴 포트를 보면서 히틀러를 연상하게 된다. 극좌나 극우가 전체사회에 대한 보완적인 기능에 머물지 않고 강제적으로 전면화되면 인간을 파괴시키는 바이러스같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폴포트의 죽음 98년 5월 오니바) 

 

위 글은 지난 98년 4월 폴포트의 죽음 직후 필자가 프랑스 동포신문 오니바에 발표했던 칼럼이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폴 포트는 부농 가계 출신으로 베를렌느의 시를 음송하기를 즐겨했고 불교적인 평온에 잠겨있기를 좋아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이 사실은 당시 프랑스 신문보도를 인용한 것으로 기억된다. 베를렌느는 19세기 프랑스 상징파 시인으로 랭보의 연인이었다. 

 

폴포트보다 앞선 시기에 파리유학을 했던 등소평이 르노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학비를 조달했었다. 폴 포트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바로 여기서 즉 좌파 전사가 아닌 부르조아지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는 데서 킬링필드의 동기를 이해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반적인 좌파지도자와 달리 그는 지주집안에서 태어나 우파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짐작을 해볼 수가 있다. 그의 존재 내에서 선천적인 우파 성향과 후천적으로 얻어진 좌파 성향이 결합된 것 아닐까? 극우와 극좌가 결합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참고가 될까 해서 역사 속에서 극우와 극좌의 연대 사례가 있나 살펴봤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간의 극적인 동맹이 맺어졌던 경우가 보인다. 히틀러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불가침협정과 함께 상호이익에 맞게 영토를 분할하려는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명에 그치고 만 전술적 동맹으로 정치적으로 무의미한 “나치 볼셰비키”라는 극소수 집단의 형성말고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결과를 겨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인의 존재안에서 극좌와 극우의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사례는 찾지 못했다. 폴포트의 경우를 유심히 살펴보는 이유는 바로 김일성이 이와 비슷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카스트로와 달리 서구의 좌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이유는 주체사상의 의식성때문이다. 주체사상의 3대요소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인데 이중 의식성은 주체사상을 매우 독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정주영이나 박정희의 "하면된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김일성주의에는 가부장적인 유교적인 요소가 스며있다. 

 

폴포트와 김일성은 극좌와 극우가 결합된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이 두 정권이 보여준 특이한 모습들은 이런 특별한 구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공산주의의 쇠망의 시대에도 북한이 살아남는 힘은 역설적으로 이같은 우파적 속성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두사람은 좌파와 우파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흥미있는 사례이다. 

학력이 낮은 사람이 보수를 지지한다?

 

 

2006년 11월에 발행된 “한국의 이념갈등 현황 및 해소방안”이라는 책자에는 흥미있는 조사결과가 실려있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와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가 관련기관의 연구용역을 받아 출간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이 발행한 이 책자의 부제는 “국민통합및 평등사회 구현을 위한 정책연구”이다. 

 

이 책은 성별 연령 교육수준과 직업에 따라 이념성향의 분포가 차이를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성별로는 남성이 여성에 비해 보수와 진보 모두 높은 비율을 보인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중도의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남성이 여성에 비해서 보다 이념성향 면에서 양극화된 경향이 높다.

 

연령대 별로 비교해보면 가장 보수의 비중이 높은 연령층은 50대 이상인 반면 진보의 비중이 가장 높은 연령층은 30대로 역시 50대이상 연령층의 두배가 넘는 24.8%가 진보적 이념성향을 보인다. 한편 20대에서는 진보의 이념성향 비중도 높지만 중도의 성향이 모든 연령중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교육수준별로 비교해보면 초증등줄 고졸 전문대졸 대졸 가운데 보수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은 초중등졸 집단이다. 전문대졸이 가장 중도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며, 대졸의 경우 진보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집단으로 초중졸에 비해 두배가 넘게 진보의 이념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보수로부터 멀어지고 진보에 가까워진다는 교육의 진보적 효과를 확인시켜준다.

 

직업집단별로 볼때 보수이념을 가진 비율이 가장 높은 직업은 블루칼라와 자영업이며, 진보의 이념을 가장 많이 가진 집단은 학생과 화이트칼라이다. 

 

소득별로는 유의미한 이념성향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중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교육수준과 이념성향의 관계이다. 초중등 졸업자들의 보수성향이 다른 학력계층보다 가장 높았다는 것인데 일반상식과 큰 차이가 있다. 

 

현행 제도에서 의무교육이 중학교까지이므로 이들은 의무교육까지만 마쳤거나 그것조차 마치지 못한 사람들이다.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계층인 것이 분명하다. 이들이야말로 가장 소외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 좌파의 진지가 될수 있는 것같지만 사실은 거꾸로다. 

 

왜 그럴까? 이들은 자신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들이다. 이들이 자신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은 마치 병약한 노인이 진보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정치사회학적인 분석의 한계가 이런 데서 드러난다. 

 

지난 30년대 당시의 주류였던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세계대공황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때 J M 케인즈가 기존 경제학의 한계를 뚫고 새로운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였다. 소위 ‘일반이론’으로 알려진 이 이론을 통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진보 보수를 막론한 각정당이나 정치 사회학자들이 분석하는 유권자 성향은 정치사회적 이론 틀에 입각한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인간성의 유형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정치가 국민의 삶에 밀착해서 작동하지 못하고 늘 겉도는 것은 이런 것도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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